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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이야기

[강태공의 문화유산 답사]

by hwang706@hanmail.net 2023. 10. 17.

[강태공의 문화유산 답사]

참으로 오랜만에 창고 구석에 방치해 두었던 낚시가방을 꺼내어 시간만큼이나 얽히고 쌓인 거미줄과 먼지를 털어 내고 경기도 연천 임진강변으로 향했다.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낚시를 하기 위해 매제와 함께 나서는 날이다. 은근히 설레이는 마음과 손에서 느껴질 전율을 생각하며 도착한 임진강변의 아담한 방죽에는 간간히 불어 오는 바람에 잔물결이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을 비우기에는 제격이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서툴러진 손놀림에 어색함을 느끼며 10여년전에 접어 둔 장비 상태를 확인해 보니 그런대로 상태는 양호하다. 새로이 줄을 묶을까도 생각했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다. 그대로의 장비를 설치하고 떡밥을 준비하니 마음 한구석이 왠지 바쁘다. 시원스레 올라 올 것만 같은 찌의 놀림을 기대하며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주시해 본다.

 

입질을 받지 못하며 많은 시간이 흐르니 처음 낚시를 배울 때 처럼 은근히 지루해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혹여나 한번일지 모를 입질을 놓칠까 하는 염려로 찌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낚시꾼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보다. 그 옛날 강태공은 그저 곧은 낚시바늘로 세월을 낚았다고 하니 자신의 시대를 맞이 하여 경영할 천하를 기다리는 자의 눈에 눈 앞의 작은 움직임은 어떤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저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는 소일거리의 가벼운 변화일 뿐일런지... 

강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방죽이라선지 시간이 지나며 바람이 차가워진다. 자켓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게 된다.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이며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인물이며 제나라의 초대 왕인 제후가 되는 인물이다. 태공은 승상의 벼슬에 해당하는 주나라 때의 관직의 이름이며 사람들이 관직 앞에 성을 붙여 강태공이라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강태공은 136살까지 살았다고 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예지하여 전반기 60년과 후반기 60년으로 나누어 자신이 다른 삶을 살 것이라 내다보고 전반기 60년은 회수강에서 낚시로 소일하며 세월을 보내고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니 후일 사람들이 낚시꾼을 일러 강태공이라 부르게 되어 강태공은 낚시꾼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인데 이는 웅혼한 이상을 펼치기 위해 자신의 시대를 기다리는 사람이 그 품은 뜻을 감추고 조용한 장소에서 홀로 신산귀묘의 계책을 가다듬으며 한 시대를 이끌어 풍미할 인연을 기다리며 계책을 준비하고 있는 자를 일컫는 것이니 낚시인들은 그 이름에 각별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편, 강태공은 주역의 확립자이며 육도삼략이라는 병법서를 남기기도 했는데 후일 손무의 손자병법은 이를 뿌리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나라에는 그의 후손으로 진주강씨와 함양여씨, 성산여씨가 있다 한다.

 

그 사이 몇몇의 태공님들이 주변에 자리를 잡고 더러는 아예 밤을 도와 세월과 밀담을 나눌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어떤 인연과 기다림을 만나기 위해 세월을 낚으려 하는 것일까...

 

해가 지려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소리가 스산하여 차가움이 더욱 가깝다.

 

귀가하는 길에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고구려 당포성(사적 제468호) 동벽을 들렀다. 남한에 몇개 없는 귀중한 고구려 문화유적으로 임진강과 한탄강 지류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으로 당개나루터 동쪽의 현무암 수직단상에 지어진 당포성은 전체 둘레 450m 길이 200m로 축성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동쪽 성벽은 높이가 6m로 임진강이 국경의 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성이라 한다. 

 

삼화교가 바로 옆에 있다.

 

성의 윗부분 모습이다.

 

망루의 역할을 했을 저 곳에 올라서 보면 주변이 한눈에 들어와 상대방의 움직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저 곳 수직단애의 위쪽에 당포성이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에 숭의전지가 있어 이 곳도 들렀다.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에 조성된 것으로 이 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후 1399년 조선 정종 1년에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1425년에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모시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만을 봉안토록하였으며, 1451년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배향토록 했다.

숭의전은 5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거듭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었으며 이를 1972년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였다. 

가까이에 숭의전지가 있어 이 곳도 들렀다.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에 조성된 것으로 이 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후 1399년 조선 정종 1년에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1425년에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모시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만을 봉안토록하였으며, 1451년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배향토록 했다.

숭의전은 5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거듭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었으며 이를 1972년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였다. 

 

내부로 들어 가는 길의 초입이다.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숭의전 앞에는 어수정이라는 우물이 만들어져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 하나의 유적지를 본다. 연천군 학곡리의 적석총이다. 학곡리 돌다돌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임진강변의 자연제방 위에 만들어진 돌무지 무덤이다.

강쪽의 구릉 말단부에 일정한 크기의 강돌을 보강하여 적석부의 붕괴와 유수로 인한 침식을 막고 자연구릉에 기대어 돌을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적석총은 서남부가 파손되었으나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으로 판단되며, 장축은 25m이고 단축은 10m이며 높이는 약 1m이다. 강돌을 이용하여 장축방향이 강과 평행게 적석되었고 적석부의 중앙에서 4기의 무덤방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발견된 유물은 고구려계 유물이 아니어서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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