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속무자획(毋欲速毋自畵)
무욕속무자획(毋欲速毋自畵)
퇴계(退溪) 이황(李滉)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는 한마디로 이황의 군주론(君主論)인 것이다.
이번 臣(신)이 상경하였을 때, 분에 넘치게 常例(상례)와 다른 자애를 받자오니 臣(신)이 비록 평소에 지혜와, 나라 경영하는 정책에 어둡기는 하오나 붉은 정성을 다하여 한가지의 어리석은 뜻을 바치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구술로만 아뢰면 정신이 흐리고 말솜씨가 없어서, 한 가지를 듣고 만 가지를 빠뜨릴까 염려 되옵기에 이에 감히 글로서 뜻을 진술 하나이다. 모두 모아 역어 六條(육조)로 갈라서 推論(추론)하온 것을 당돌하게도 前疑(전의)에 올려 드리오니 큰 도움은 감히 바라지 못하오나, 인군의 箴(잠)에 다소라도 보탬이 될까 하나이다.
이러한 내용의 서문을 들어 밝히고 다음 여섯가지를 펼친다.
첫째. 重繼統 以全仁孝 : 繼統(계통)을 重(중)이 하여 仁孝(인효)를 온전하게 할 것.
둘째, 杜讒間 以親兩宮 : 참소(讒訴)를 막아 양궁(兩宮)을 친하게 할 것.
셋째, 敦聖學 以立治本 : 성학(聖學)을 돈독(敦篤)히 하여 정치(政治)의 근본을 삼을 것.
넷째, 明道術 以正人心 : 道術(도술)을 밝혀 人心(인심)을 바로 잡을 것.
다섯째. 推腹心 以通耳目 : 腹心(복심)을 미루어 耳目(이목)을 통할 것.
여섯째. 誠修省 以承天愛 : 修省(수성)을 정서스러이 해야 하늘의 사랑(天愛)을 이어 받음.
이러한 여섯가지의 내용을 하나하나 밝힌 이후 후설을 기록하였는바 그 내용의 후단에 무욕속무자획(毋欲速毋自畵)라 언급하고 있다.
위 六條(육조)에 기록한 바는 다 무슨 사람의 耳目(이목)을 놀랠만한 굉장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實(실)은 性(성) 道(도)에 뿌리박고 聖賢(성현)에 근거하되 中庸(중용) 大學(대학)에 맞추고 史傳(사전)에 상고하여 時事(시사)에 증험하여 말씀 드린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殿下(전하)께서는 卑近(비근)하다 해서 할 것이 못 된다 마시며 실제와 관련이 없다 해서 할 필요 없다 마시고 반드시 먼저 처음 二條(이조)로서 근본을 삼으시고 더욱 聖學(성학)의 功夫(공부)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효과를 보려하지 마시고 스스로 한계를 긋지도 마시고 그 極致(극치)를 다하여 과연 여기에 얻은바 있으시면 나머지 다른 일들도, 날을 따라, 일을 따라 더욱 밝아지고 더욱 충실하게 되어, 理義(이의)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함이 참말로 소고기 도야지 고기가 입을 기쁘게 하듯이 될 것입니다.
右六條所陳 皆非有驚天動地震耀人耳目之說 然而實謹於彝敎 而本於性道 宗於聖賢 而質於庸學 稽之史傳 而驗之時事以爲言 惟殿下勿以爲卑近而不足爲 勿以爲迂闊而不必爲 必先以首二條爲本 而尤勤勵不息於聖學之功 毋欲速 毋自畵 以極其至於此 而果有所得 則其他事固亦隨日隨事 而益明益實 理義之悅心 眞是如芻豢
이황은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01년(연산군7)에 태어나 1570년(선조3)에 사망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이후 고향 퇴계에 은거하여 학자의 삶을 살았다.
명유들과 토론하고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주해·편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했다.
68세에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사후 그를 기리는 서원을 지어 도산서원 사액을 받고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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