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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이야기

[고독길, 한번쯤 읽어 보고 가면 좋을 것 같다]

by hwang706@hanmail.net 2023. 5. 12.

[고독길, 한번쯤 읽어 보고 가면 좋을 것 같다]

 

한경닷컴 bnt뉴스 기사제보 kimgmp@bntnews.co.kr

 

외부에서는 등반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바윗길인 고독길은 인수봉을 오르는 비밀스러운 시크릿 가든과도 같다. 고독길은 오른쪽 아래부분에서 인수봉 정상 오른쪽으로 툭 튀어 나온 귀바위 방면으로 오른다.

 

 

한 낮의 서울 도심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여름날. 이 날도 인수봉 등반을 하겠다고 못 말리는 바윗꾼 일곱 명이 모였다.

바위가 뜨겁게 느껴지는 이 같은 무더위에 인수봉을 등반하겠다고 자신 있게 나선 이유는 이날의 등반코스가 고독길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고독길이 첫 등반이다. 오늘에서야 고독길에 오른다고 실토(?)를 하니 이번 인수봉등반이 세 번째인 신입회원이

“고독길을 두 번이나 올랐으니 고독길은 자신이 선배"라며 기자를 놀린다.

인수봉을 처음 오를 때 주로 선택되는 길은 역시 고독길이다. 남측에 위치한 비둘기길은 하강을 하는 등반자들에게 방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고독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고독길은 연중 등산학교의 졸업등반으로 붐비는 것이 사실이고 앞팀의 등반이 늘어지면서 정체를 빚는 경우도 많다.

고독길을 오를 기회는 그동안 무수하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려운 길을 먼저 하고 쉬운 길은 천천히 한다는 생각에 그만 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린 탓도 있다. 고독길은 과연 그냥 쉬운 리지길에 불과할까 아니면 나름의 멋과 맛이 있는 독특한 바윗길일까?

 

 

고독길은 비둘기샘에서 인수봉 방면으로 오르다가 비교적 너른 공터에서 우측 소로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쉽게 생각하면 인수봉 대슬랩 밑으로 오른쪽 끝까지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계속 오르다보면 벗길, 취나드A, 심우길로 진입하는 어프로치 바윗길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그곳이 바로 고독길의 첫째 마디 출발점이 된다. 고독길이 앞팀의 등반으로 밀려 있을 때 성질이 급한 등반자들은 취나드A와 심우길을 이용해서 고독길로 넘어오기도 한다.

고독길의 등반 난이도(5.8)는 인수 남측의 비둘기길(5.7)과 함께 인수봉에서는 가장 등반이 수월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역사로 치면 고독길은 인수의 모든 바윗길을 통털어서 가장 형님뻘이 되는 바윗길이다. 

고독길은 기록상 가장 먼저 인수봉을 오른 아처가 이른바 '아처루트'로 오른 1929년 9월보다 2년 먼저인 1927년, 연세대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 박사가 초등했다. 다만 “북면으로 등반을 시작해 고독길 둘째 마디 동굴을 통과하여 영자크랙을 통해 인수 정상에 올랐다”는 기록을 남긴 아처에 비해 기록은 없고 구전으로만 인수봉 등반을 했다는 '미확인 기록'이라는 것이 아쉽다.

초등자가 언더우드라 치면 고독길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하루재'가 하루에 오를 수 있는 고갯마루라 하여 하루재라고 불리다가 고유의 이름이 된 것처럼 여러 사람들이 부르다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지금은 절판된 책 이규태의 <리지등반>(산악문화 출판/ 2006년 9월 출간)을 보면 고독길 이름에 대한 유래가 언급되어 있다.

고독의 길에 대한 코스명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인수봉 등반에 지각한 어느 클라이머가 혼자서 고독하게 올라갔다 하여 그리 되었다고도 하고 인수봉 등반중 급한 소식을 전해 듣고 혼자서 고독하게 내려갔다 하여 그리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하여튼 인수봉의 다른 코스와 달리 5.11급 이상의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조심조심 혼자서도 오르고 내릴 수 있다는 얘기이다.

30년 전 과거에는 볕이 잘 들지 않고 약간 으스스한 고독의 길을 등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인수봉이 붐비지도 않았고 다른 코스에서 얼마든지 훈련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고독의 길에 항상 많은 사람이 몰리고 평일에도 초보자 교육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항상 그늘진 그곳은 여름에도 시원하고 피부가 햇볕에 그을리지 않아 오히려 좋아들 한다. 그래서 고독의 길은 이제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은 등반길이 되었다.

이규태 씨는 "고독의 길은 소문처럼 그렇게 쉬운 길은 아니므로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혼자 내려오면 매우 위험하다"라며

 “클라이밍 다운을 할 때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둘째 마디 등반이 끝나면 시원한 동굴이 나타난다. 자일을 사려들고 통과하는 것이 편하다.

 

고독길을 '고도의 길'로 부르자는 일부 의견도 있다. 고독길에서는 오래된 도자기 조각들이 나와서 ‘옛 고(古)’ 자와 ‘질그릇

 도(陶)’ 자가 합쳐져서 '고도의 길'이 되었다는 것인데 아직까지는 추론일 뿐이다.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부르자는 의견도 많지만 아직까지 ‘북한산’이 대표하는 말이듯 바윗길의 이름 또한 그 시대를 등반하는 사람들의 합의가 이루어져서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독길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 아마다블람을 등반한 산악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마다블람 초입의 분위기가 겨울 고독길과 무척 유사하다"라는 말들을 한다. 그래서인지 고독길에는 한 겨울에도 믹스클라이밍(Mixed Climbing)으로 인수봉을 오르는 산악인들이 적지 않다. 등반을 하면서 바위를 잘 살펴보면 아이스바일에 긁힌 자국들이 무수히 많은데 이것이 바로 한겨울 믹스등반의 흔적이다.

1월1일 새벽, 믹스 등반으로 인수봉 정상에 올라 인수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것은 진짜 바윗꾼들만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5.8의 비교적 쉬운 바윗길은 아이스 바일을 사용하여 등반을 하게 되면 M4등급이 되며 이것은 5.8난이도의 암벽을 아이젠을 착용하고 연속으로 어려운 동작을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등반팀은 벌써 첫째 마디 출발점에 와닿았다.
첫째 마디는 난이도 5.6의 크랙길이다. 거리는 약 15미터. 출발지점부터 종료지점까지 계속 양호한 홀드가 이어지기 때문에 홀드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초보자도 무난하게 등반을 마칠 수 있다.

 

 

이날 고독길을 선등하는 분은 인수봉 건양길을 개척하신 함기철 대장이다. 함 대장은 벌써 30여 년 전 등반을 하던 시기의 추억을 구수하게 설명해주기도 하고 틈틈이 등반기술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 흥미롭고 재미있는 등반으로 이끌어 준다. 젊은 시절, 지금은 전설이 되다시피 한 크레타 슈즈를 신고 바윗길을 개척하던 당시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크레타슈즈'는 1970년대 말경에 출시된 워킹용으로 경등산화로 소가죽 제품이다. 당시로서는 고가인  25,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이 등산화만 신었다하면 산꾼으로 인정되던 시절이었다.

함 대장은 이날 1980년대 중반 지금은 사라진 RF사의 암벽화를 신고 등반했다. 이 신발이 나오고 나서야 건양길 첫째 마디를 직상으로 등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37) 인수봉 건양길 / 영원한 ‘톱쟁이’ 함기철, 그는 왜 건양길을 개척했을까?>에 언급된 바와 같다.

첫째 마디 앞에서 차분하게 손에 초크를 묻힌 함 대장은 이제는 아무도 신지 않을 듯 고무가 딱딱해진 RF 암벽화를 신고 첫발을 뗀다. 사뿐하게 두 세 걸음을 올라 선 다음 오른쪽으로 길게 나있는 크랙에 트라이캠을 설치하고 등반을 이어 나간다. 트라이캠은 프렌드에 밀려 대중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크랙에 설치하는 확보물로 너트와 캠의 장점을 따서 경량으로 만든 제품이다.

둘째 마디는 난이도 5.6 거리 약 30미터의 크랙길이다. 출발지점 왼쪽 크랙에 프렌드를 하나 설치하고 손에 잡히는 홀드를

살펴가며 등반을 시작한다. 이 구간을 통과하면 동굴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는 자일유통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자일을 사려들고 동굴을 통과하게 된다. 동굴 안은 제법 서늘하다.

동굴을 지나면 셋째 마디의 출발지점이 나타난다. 셋째 마디는 거리 30미터에 난이도 5.8의  크랙길이다. 난이도로만치자면 이곳이 가장 어려운 셈이다. 이어지는 넷째 마디는 10미터의 크랙길. 이 구간을 통과하면 다시 걸어 올라가서 다섯째 마디와 만난다.

 

 

다섯째 마디 앞에 서면 높게 솟아오른 인수봉 귀바위의 모습이 자못 웅장하다. 오른쪽으로 약 40미터에 이르는 난이도 5.6의 크랙길을 따라 올라가면 귀바위 오른쪽, 흔히 말하는 개구멍으로 통과한다.

다섯째 마디를 마친 지점은 고독길을 통 털어서 가장 시원한 장소다. 취재팀의 뒤를 이어 등반을 하는 T산악회 회원들은 이곳에서 얼려온 페트병 맥주를 한잔씩 따라 마시며 더위를 식힌다. 

여섯째 마디는 거리 5미터의 짧은 구간이다. 계단처럼 직상으로 올라서서 왼쪽 바위로 왼발을 벌려 딛고 건너가면 된다. 이곳은 인수A와 합쳐지는 구간, 즉 인수A 넷째 마디 등반이 끝나는 지점이다.

일곱째 마디에서 고독길의 백미라는, 그러나 다른 바윗길에서는 걸어가는 구간으로 구분되는 ‘영자크랙’이 등장한다. 흔히 말하는 ‘영자크랙’은 여성의 상징처럼 생긴 크랙의 모양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는 것이 정설인데 속된말로 부르던 이름이 정식명칭이 된 셈이다. 이 역시 동 시대 산악인들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쉽게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자크랙은 무수히 많은 등반자들이 등반을 하면서 무척 미끄러워졌다. 아무리 실력 있는 등반자라고 하더라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여덟째 마디에서는 매끄러운 참기름 바위를 넘어서게 되고 드디어 고대하던 인수봉 정상이 나타난다.

인수봉 정상은 어떤 이에게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어떤 이에게는 열 번의 등반이 다 되어가도록 등정을 허락지 않는 경우도 있다. 힘들어하는 후배나 신입회원에게 “인수봉 정상에 가면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으니 잔돈을 잘 챙겨라”고 말하는 선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후배들은 적잖은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방이 뻥 뚫려 백운대보다도 더 시원한 전망을 안겨주는 인수봉의 첫 경험을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수봉 정상에는 고인돌 형태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만만치 않은 크기로 보아서는 원래부터 인수봉 정상에 있던 바위처럼

보이지만 고인돌을 받쳐놓은 돌의 모양들을 보아서는 부분적으로는 인위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인수봉이 위치한 북한산은 삼국시대에 삼국이 서로 접촉을 하면서 수비와 공격을 하던 접경지역이었다. 험난한 지형은 지금으로 치면 천혜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북한산의 인수봉, 백운봉에 올라 이곳을 나라로 세울 땅으로 살피기도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로 비추어 볼 때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 선조들은 인수봉을 어떤 방법이든 올랐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날 등반은 약 4시간 반 정도가 소요됐다. 앞 팀은 보이지 않았고 뒤 팀도 여유를 두고 따라왔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등반을 한 셈이다. 정말 오랜만에 인수봉 고인돌 아래에 자리를 펴고 여산우들이 준비해온 과일과 음료를 나누어 마시며 인수봉 삼매경에 빠져본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곧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는 법. 하강을 위하여 인수 남측면으로 자리를 옮긴다.

인수봉 고독길은 전혀 고독하지 않았다. 오래된(古) 도자기(陶) 파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감에 살이 떨리는 바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적당히 긴장하며 재미있게 오를 수 있는 바윗길과 곳곳에 위치한 쉴만한 장소 그리고 멀리서만 바라보던 인수봉 귀바위의 위용, 바위와 바윗길 곳곳에 새겨져 있을 것만 같던 인수봉 등반의 역사와 근현대사 속의 우리나라 등반사,

즐거운 등반을 즐기는 등반자들의 유쾌한 웃음소리…

이 모든 것들이 다 합쳐진 것과 같은 느낌을 고독길은 전해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또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고독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이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며 그렇게 자리 잡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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