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金素月) 본명 김정식(金廷湜) 1902. 9. 7.~1934. 12. 24.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에서 자랐다.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 후 귀국한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감소월은 1934년 12월 24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시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하독작(月下獨酌)] -이백(李白) (0) | 2023.07.28 |
---|---|
[중년의 가슴에 7월이 오면] -이채 (0) | 2023.07.26 |
[친구가 되어다오] -알베르 카뮈 (0) | 2023.06.22 |
[고독] -김현승 (0) | 2023.06.20 |
[침묵 이야기] -법정 (1) | 2023.06.15 |